유형 문화재

【시 지정:유형 문화재 (건조물)】먀쓰 묘

이 오래된 묘지는 미야코 특유의 먀카(묘지 양식)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바깥 둘레 부분을 세로 7.6m, 가로 10.6m, 높이 2.2m규모로 큰 포석을 쌓아 올리고 아치형 석조부를 정면에 배치하였는데, 그 기술은 지극히 정교하다. 내부에는 석실이 두 개 있고, 각각은[…]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고문서】가와미쓰가의 족보

河充家の系図

가와미쓰 씨란 가와미쓰 우푸투누를 원조로 삼는, 이름이 “真”자로 시작하는 일가를 말한다. 족보를 보관하고 있는 이는 우푸투누의 자손, 스가마 마을의 마쓰무라 씨이다. 족보는 1대부터 12대까지 인물의 생년월일, 직함, 사망 연월일이 기입되어 있다. 서체도 해서, 초서[…]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역사 자료】쇼에이 씨 모토무라 일가 관계 자료

向裔氏本村家関係資料

이름 첫 글자에 “조朝”자를 가진 일가를 미야코에서는 “쇼에이 씨”라고 부른다. 이는 오키나와 본도의 쇼 씨와 명맥을 함께 하는 것이다. 몇 개의 일가가 있지만, 지금 출신이 명백한 것은 다음의 두 일가 뿐이다. 하나는, 우라소에 외카타 조시와, 다라마의 운타바루 씨와[…]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서적】온가와사토누시 페친의 묘비

恩河里之子親雲上の墓碑

막부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묘비로써는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모래암석(높이 62cm, 가로 33cm, 폭 위 5-14cm, 아래 17cm)이 재료로써 사용되었다. 묘비에는 오른쪽 위에서부터 “支流長真氏恩河仁也、乾隆年間卒。向姓恩河里之子親雲上墓、同治十一年壬申在[…]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유형 민속】구스쿠베의 아기이스(힘겨루기를 위한 돌)

ぐすくべのアギイス(力石)

전쟁 전에는 각 마을에서 청년들의 힘겨루기 대회가 자주 열렸다. 씨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의 역도에 해당하는 것이 “아기이스”이다. 각 마을의 청년회장(현재, 마을회관)에는 큰 돌과 작은 돌, 두 개의 아기이스가 갖추어져 있었다. 마땅한 오락이 없었던 옛날, 농[…]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서적】모토무라 일가 “호혼” 비

本村家「報本」碑

이 “호혼(報本)”의 비의 석문은, 쇼타이 왕 시대의 삼사관인 쇼 유코(기완 왜카타 조호)가 일족(쇼에이 씨)이었던 시모지 마을 촌장 쇼 조쇼(모토무라 조쇼, 재임 1851-76년)에게 보낸 것이다. 이 비가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비석은 직육면체의 […]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건조물】히라라 제일 초등학교의 정문과 돌담

平良第一小学校の正門と石垣

히라라 제일 초등학교의 돌담은 1932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된다. 건축되고나서 73년 경과한 것이다. 현재, 학교 부지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 중에서 남쪽은 부지를 확대한 결과 사라졌지만, 당시의 정문을 포함한 세 방향의 돌담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포석 기술[…]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건조물】니시쓰가 묘지

西ツガ墓

미스모지씨 일가의 묘지는 동서 양쪽으로 2기가 나란히 있다. 2기 모두, 속칭 “쓰가 묘지”라고 불린다. 쓰가란 되를 의미하고, 쓰가 묘지란 되처럼 사각형이라는 것을 뜻한다. 한편, 많은 인부를 고용하여, 한 되의 돌을 파는데 한 되의 곡식, 조粟가 필요했다는 것을 의[…]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건조물】히사마쓰 먀카(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묘지) 군

久松ミャーカ(巨石墓)群

먀카는 구가이, 마쓰바라 두 마을에 걸쳐 있다. 예전에는 다수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4기가 전부이다. 먀카에 대해서, 히사마쓰에서는 옛부터 “부사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나무라 겐푸, 가네코 에리카 두 명에 의한 연구 보고가 있다. 창[…] read more – >

【미야코지마시 지정:유형 민속】나나마타의 미마가

七又のミーマガー

나나마타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절벽아래에 있는 샘이다. 나나마타 지역은 샘이 부족해서 음료수의 수원을 확보하기에 상상 이상의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이 샘은 절벽아래에 있기 때문에 바위를 따라 내려가야만 했다. 물의 운반이 중노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read more – >